📑 목차



퇴원하신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신 뒤 눈에 띄게 달라지셨다.
병원에서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신 것 같았다.
하루에 한 번씩 손자들의 국어책을 꺼내
소리 내어 읽으셨고 공책에 글자를 따라 쓰셨다.
“이게 참 어렵네.” 하루는 받침이 복잡한 글자가
도무지 헷갈린다며, 나를 부르셨다.
읽는 것도 어렵고, 쓰는 것도 어렵다고 도와달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둘이 마주 앉아 공부하는 시간이 의외로 즐거웠다.
틀린 글자를 고쳐드리면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웃으셨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나는 점점 답답해졌다.
글자를 설명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그 시간 동안 다른 집안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학습지 선생님을 불러보기로 했다.
학습지 상담소에 전화를 걸었다.
“국어랑 수학을 같이 하고 싶은데요.”
상담원은 바로 물었다.
“아이가 몇 살인가요?”
“다섯 살이요.”
“오늘 바로 선생님 보내드릴게요.”
그때
내가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다섯 앞에 팔이 붙어요.”
잠깐의 정적.
“예…?”
상담원이 되물었다.
“85세요.”
그러자 상담원도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세가… 85세이셔도 가능하시긴 한데요…”
된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이 괜히 고마웠다.
가을이었다.
마당에는 낙엽 부스러기가 쌓였고
나는 잡초를 뽑고 있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학습지 선생님이
밝은 얼굴로 서 계셨다.
그리고 어머니를 보자 순간 표정이 멈췄다.
“어… 어머님이 학생이세요?”
어머니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대답하셨다.
“응. 내가 학생이야.”
그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당당했다.
그날 어머니는 연필을 쥐고 자음과 모음을 다시 배웠다.
틀려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셨고
선생님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셨다.
나는 마당에서 낙엽을 쓸면서 창문 너머를 보았다.
한 달 전 목욕탕에서 힘없이 늘어졌던 모습과
지금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었다.
아픈 몸으로 누워 있던 사람이 아니라
다시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 같았다.
나중에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때 목욕탕에서 정신이 흐려질 때 내가 생각했어.
이렇게 끝나면 안 되겠다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어머니의 하루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어하셨다.
연필을 쥐고 문제를 풀며
“아이고, 이거 재밌네.”
하시는데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다행이다.
어머니도 즐겁고
다행이다.
나도 내 시간이 생겼다.
가을이었다.
햇볕은 포근했고 바람은 차갑지 않았다.
공부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그날은 수학 시간이었다.
수업이 거의 끝날 시간인데 선생님이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나는
마당에서 낙엽과 마른 잡초를 치우고 있었다.
그때
집 안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일로 와봐라.”
방으로 들어가니 수학 선생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야야,
내가 덧셈은 되는데 뺄셈이 안 된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보며 물으셨다.
“니는 나한테 100 빼기 1을 가르칠 수 있나?”
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여기 백만 원이 있어요.
저한테 만 원을 주시면 얼마가 남아요?”
어머니는
잠깐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셨다.
“99만 원이 남지.”
“맞아요. 그게 100 빼기 1이에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어머니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수학 선생님을 보며 말씀하셨다.
“당신은 나한테 안 와도 되겠어.
그걸
한 번에 설명을 못하나.”
선생님은 난처한 얼굴로 짐을 챙겨 나가셨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못 했다.
그날 이후 수학 선생님은 다시 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시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연필을 쥐고 숫자를 적고
지우고 다시 적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늙은 딸을 키우고 있구나.
아이를 키울 때는 성장이 보이지만
부모를 돌보는 일은 되돌아보게 만든다.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게 아니라
어떤 순간에는 거꾸로 흐른다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어머니는
다시 배우고 있었고
나는
다시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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